한국경제신문

이명래고약을 아십니까?(한국경제신문, 2024.01.12,금)

sosohanthings 2024. 1. 13.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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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이상이신 분들은 들어보셨죠? 이명래고약.
저는 아는 걸로 봐서 40대 이상인 걸로  ㅎㅎ


오늘 한국경제 arte  면에 이명래고약 관련된  글이 있었는데요 신문에서 보니 엄청 반가웠어요.
추억의 고약~~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몇 자 적어 봅니다.

 

 저 어렸을 때 부스럼, 종기가 많이 났었습니다. 아직도 몸에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의약품이 부족했던 그 시절, 이름을 떨친 의약품이 있었으니 바로 '이명래고약'입니다.

 

한국경제신문 요약입니다.

이명래고약

옛날  충청 지역 40개 고을의 조세미를 쌓아두던 '공세리'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서해바다와 인접해 신부들의 왕래가 잦았던 곳이라 일찍부터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1895년 5월, 이 마을에 에밀 드비즈 신부가 본당 주임으로 왔다. 성당의 본당 신부로 부임한 드비즈 신부는 ㅠ사랑을 전하는 방편으로 의술을 익혔다. 한국에 와보니 마을 사람들이 기름진 음식을 먹지 못해 부스럼이나 종기가 많이 나는 것을 알았고, 이에 드비즈 신부는 생약 처방에 관한 서양 원서와 한방 의서를 놓고 치료 약을 만들어 시험했다. 의학에 관심이 많은 데다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온 사람이기에 서양의학과 한방을 곁들인 동서양 의술을 결합하여 부스럼을 치료하는 고약을 만들었다. 이것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 줬고, 종기난 부위에 붙이니 며칠 만에 감쪽같이 나았다고 전해진다. 신부의 곁엔 자신의 심부름을 잘해주던 성실한 소년이 있었는데, 그 소년이 이명래였다.

드비즈 신부는 피부병을 낫게 한 고약 조제법과 의학 기술을 형편이 어려워 학교도 가지 못했던 이명래에게 기술을 가르쳐줬다. 신부에게서 고약 제조법을 전수받은 그는 1906년 스스로 약을 만들 수 있게 됐다. 이명래는 어린 나이네 아산에서 명래한의원을 개업해 돈을 벌다가 자신감을 얻어 1920년 서울 충정로로 올라와 한의원을 개업했다.

 

 "매일 300~400명의 환자가 새벽부터 이곳에 몰려왔다. 번호표를 나눠주고 대기하게 한 다음 진찰하고 고약을 팔았다."

라고 이명래의 막내딸 이용재는 회고한다. 앞마당에는 진찰을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로 약재를 큰 가마에 넣고 고아서 약을 제조하는 사람, 만들어진 고약 덩어리를 으깨서 기름종이에 늘어뜨리는 사람, 아궁이에 뿔 때는 사람, 재료를 조달하러 이리저리 뛰는 사람...   사업이 날마다 번창했다.

 

그런데, 전쟁이 났다.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머물렀는데, 9·28 수복 때 아군이 쏘아대는 포탄이 둘째 사위 이광진의 집으로 떨어져 이광진을 제외한 둘째 딸과 2남 2년 외손자, 외손녀를  모두 잃었다. 한술 더 떠, 인민군들은 후퇴를 하며 이명래 한의원에 불을 졌고, 이때 사진은 물론 제약에 필요한 자료들이 몽땅 소실됐다.

 

이명래는 사위 이광진과 남은 가족을 데리고 평택으로 피난을 갔는데, 1952년 1월 7일 뇌출혈로 사망한다. 1952년 서울로 돌아온 이광진은 폭격으로 폐허가  된 명래한의원 간판을 달고 장인의 사업을 이어갔다. 이광진은 장인에게서 물려받은 비법을 토대로 충정로역 뒤편에서 고약을 계속 만들었다. 사위들이 가업을 이어가던 구조였던 이명래 고약의 3대 계승자는 경희대 한의대를 졸업한 임재형이었다. 이명래한의원은 고약의 이미지가 강해 보약 손님은 거의 없었다. 수익이 나지 않았고 2011년 영업을 중단했다. 지금도 외형은 이명래한의원 당시의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이명래의 딸 이용재는 이명래 고약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고약의 성분을 일부 변경해 다량 생산에 나섰고, 1980년대 까지 많은 사람이 사용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형편이 나아지며, 종기로 고생하는 사람이 없어지고 고약 대신 바르는 연고제가 선을 보이며 2002년 이명래제약도 문을 닫았다.

 

이후 다른 제약회사가 제조 및 판권을 샀고, 그래서 지금도 약국에 가면 살  수 있다고 합니다.

반가웠던 신문기사였습니다. 좀 더 훌륭한 제약회사로 거듭나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힘들었던 시절 누군가의 사랑과 봉사로  어려운 시절을 함께 잘 이겨낸 것처럼 지금의 우리도 함께 잘 이겨내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해 치지 않고, 서로서로 도우면서 살았던 그 시절의 정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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